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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2 세/웅크리기

샤워하고, 청소하고, 공부하고, 자고, 다시 일어나야겠지.

by 정가나 2022.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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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외지, 가정집에 몰래 숨어들어 아이를 빌미로 부모의 수족을 봉인한다. 이윽고 아이의 수족도 봉인한 후 재갈을 물린다. 아이의 손에 칼자루를 밀어넣고 그 위를 나의 손으로 덮는다. 천천히 아이의 손을 양친의 목으로 밀어넣는다. 실성한 아이를 뒤로 한채 유유히 집을 빠져나온다. 그런 싸이코패스의 이야기를 언젠가 한번 써보리라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게 정유정 작가님의 [종의 기원]이었다. 오묘한 기분에 휩싸인 채 문득 TV에서 봤던 싸이코패스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3년간 집 안에 틀어박힌 채 연구까지 감행했던 작가님의 인터뷰가 떠올라 혹시 그 분이 이 분이었나 싶어 잠정적으로 씁쓸한 결론을 내렸다.

 그때 나는 왜 저 이야기를 쓰고 싶어했을까? 아마도 부모에 대한 원망의 화신이 글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싶다. 정유정 작가가 에필로그에서 언급했듯 나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도 악이 존재하고 있었고, 다행히도 포식자급의 싸이코패스가 아니었기에 그것이 행동으로 발현되지 않고 생각에 그쳤다. 선과 악이 공존하며 진화해왔기에 부모에 대한 애정, 도덕적 양심 등이 상상 속 살인현장의 등장인물을 '나'와 '나의 부모'가 아니라 제 3자의 인물들로 등장시켰다. 오래 전 기억들이기는 하나 곰곰히 복기를 해보면 나는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친족살해의 의지를 인식하는 동시에 폐기시켰고, 자살로 결론을 내렸었다. 부모를 죽일 수 없으니 자살을 하겠다라는 것인데 증오심과 애정이 뒤섞인 도의적인 사고처리였다고 생각한다. 보여주기식 자해를 시도하는 사람들처럼 이타적인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결론이라는 가능성도 전혀 배제하지는 않는다. 아마 방금 말한 모든 게 이성이 인식하는 범위 외에서 부지불식간에 처리된 것이 아닐까.

 새로운 환경에 접어든 지도 어느새 반년이 지났다. 이제는 이곳에 다소 적응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환경에서 새로운 환경으로 나 자신이 옮겨질 때 스스로가 보이는 패턴도 어느새 갈피가 잡혀간다. 나라는 사람은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고, 궁리하고, 시도하고, 과거를 해석하고, 혼란에 적응하려고 하며, 인식이 굳어진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로 넘어가고자 하는 것까지 내가 지극히 인간의 영역에 있음을 깨닫는다. 아, 또 현타. 특정 행동에 대한 1차적인 해석을 함과 동시에 그 해석에 대한 2차적 해석을 한다는 것은 꽤나 골치 아픈 일이다. 예컨대 글을 쓰면서 과거의 나 자신을 해석함과 동시에 과거의 나 자신을 해석하고 있는 현재의 나 자신을 해석하는 일이랄까. 음... 그니까 돈이 없는 사람이 과거로 돌아가 비트코인을 대량 구매해서 부자가 되는 상상을 함과 동시에 그 상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인지되면서 스스로의 궁핍함이 더욱 부각되는 일이랄까. 즉, 현재 나 자신의 문제를 아주 제대로, 미간에 가져다 꽂아놓은 것마냥 인식했다는 것이다.

 누군가 궁금해하고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글을 쓰려는 열정은 아쉽고, 나 자신을 갈무리하고자 할 때 글을 써대는 것을 보면 나와 소설가는 거리가 좀 있나 싶다. 나는 일기를 쓰고 있다. 누군가 보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볼 수 있는 환경에 업로드하는 일기. 순전히 나 자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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