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가을, 반수생 신분이었던 나는 고등학교 동창 녀석을 통해 소개팅에 나가게 됐다. 연애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장기간을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홀로 외로웠던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흔쾌히 나가기로 했다, 했던 것 같다. 한치의 고민도 없이 친구의 소개팅 제의를 수락했기 때문에 앞선 이유가 주가 되지 않나 싶다. 물론 수락한 이후에 수능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후회와 죄책감에 다소 시달리긴 했지만 이것 또한 경험이 될 것이라는 근거를 내세워 찝찝한 감정들을 외면했다. 2주 후, 오후 6시, 홍대 정문에서 그녀와 만나 근처 식당에 가기로 했다. 막상 소개팅 날짜를 정하고 나니 그나마 남아있던 미미한 공부 의욕도 날아가버리고 그녀를 만나기 전날까지 유튜브를 통해 마녀사냥을 정주행 했다. 많고 많은 유튜브 콘텐츠 중에서 왜 하필 마녀사냥이었을까. 그건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마녀사냥이었기에 내가 글을 쓰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다고 확신한다.
소개팅 당일, 평소에는 지지리도 떠지지 않던 눈꺼풀이 아침 일찍 자연스레 떠졌다. 아, 나는 그저 속물일 뿐인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안좋은 생각은 할수록 안 좋다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남은 시간 동안 무얼 하지, 공부는 하기 싫은데, 보던 마녀사냥이나 마저 보다 갈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 소개팅 장소 근처 서점에 들러 책을 읽다가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평소 책과 굉장히 거리가 먼 나였지만 반수생 신분으로서 그나마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을 덜 느끼면서 생산적인 활동으로 여겨지는 것이 독서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오후 1시쯤 홍대입구역 근처 영풍문고에 발걸음을 옮겼다. 뭘 읽지, 뭘 읽을까, 뭐가 재밌을까. 그러다 책 한 권이 눈에 밟혔다.
[살고 싶다는 농담]
논리적인 과정을 거쳐 그 책을 읽어야겠다는 사고과정이 채 일어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집어 들었다. 산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를 농담처럼 던진다. 이게 무슨 말일까. 살고 싶다는 말을 농담처럼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근데 이게 누구야. 허지웅 아저씨잖아. 내가 어제까지 보던 마녀사냥에 나오던 그 재밌는, 매력 터지는 형이잖아. 액정 속에선 웃고 있던 사람이 이런 제목을 달고 내 앞에 등장했다.
그런데 위로를 받았다.
나는 살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눈을 떠보니 그저 삶이 부여되어 있었다. 태어나서 몇 년간은 본능대로 살아왔는데 점점 삶이 나에게 부과하는 무게를 버텨낼 수 없었다. 살기를 선택한 것은 내가 아닌데 태어난 이상 살아야 했다. 왜? 죽기 싫으니까? 죽기 싫으니까 산다는 것은 무의미했다. 전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게 도대체 뭐야. 공장의 톱니바퀴로 태어나 몇만 번을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크기로 돌다가 수명이 다하면 버려지는 부품과 다를 게 뭐야. 보다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그 어떤 것에도 얽매여 있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오래 살아봐야 100년도 안될 터인데 그 짧은 시간 동안 헌신할 수 있는 어떤 것이 필요했다.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면 만족하며 옅은 웃음을 띈 채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어떤 것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가지면 경제적으로 허덕이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에 반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가정을 꾸려서 자식을 가지면 그걸로 된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가치관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날이 찾아왔다.
아, 그냥 죽어야겠다.
그날 이후, 나는 아버지에게 거대한 반항심이 있는 동시에, 그에게 거부당하는 것에 대한 강한 공포심도 있었기에 나의 의견을 완강하게 피력할 생각은 못하고 그저 그에게 나의 가치관이 거부당한 것에 대한 슬픔과 분노로 가득차 있었다. 거기에 아버지에게조차 수용당하지 못하는 나라는 존재, 어차피 내가 선택한 삶도 아닌데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막살다가 정말 끝이 왔다는 느낌이 오면 수면제를 잔뜩 먹고 죽어야겠다. 그게 제일 아프지 않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뭐 이런 식의 생각들을 가지고 미미한 생의 의지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며칠 후 고등학교 동창 녀석이 소개팅을 제안해왔다.
"그 밤은 여지껏 많은 사람들을 삼켜왔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한 사람을 그 밤은 결코 집어삼킬 수 없다."
"이건 나와 여러분 사이의 약속이다. 그러니까, 살아라."
살아라. 그래도 살아보는 것이다. "쟤 아직도 살아있어? 진짜 끈질기네." 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버텨내가는 것이다.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가 나의 삶을 거부해도 살고자 하는 이 본능을, 나대로 살고자 하는 이 마음을 스스로에게 관철하는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거면 살아갈 이유로서 아주 충분하다. 그러니까, 살아라. 나는 네가 살았으면 좋겠다.
다른 환경, 다른 조건들에서 자라나 서로가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건넬 수 있는 위로란 이런 것이 아닐까. 동일한 종의 생명으로 서로가 진실로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은 죽음이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건네는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이 세상에서 당신에게 건넬 수 있는 유일하고 귀한 위로인 것이다.
살짝 현실적인 이야기로 돌아가볼까. 앞으로 그려질 수 있는 나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 중에서 가장 곤궁한 삶이 무엇일까. 일용직, 한달 100만원 중후반대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급여, 고시원,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돈을 벌지 못한다는 것은 곧 사회로부터 고립된다는 것. 그것을 전제로 하고도 내가 살아가고 싶을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을 잃고도 진정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일까.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 나의 글을 쓴다. 그래, 그거면 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의 작가로 생을 마감하더라도 읽고 쓰는 삶을 산다. 그것이 나의 프라이드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자연스레 짊어질 자유로부터 오는 두려움과 책임이라는 생의 아젠다를 오직 스스로의 힘만으로 버텨냈다는 것이 나의 삶의 이유다.
"가나님, 가나님의 현재 목표는 뭐에요?"
- 글쎄요..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
"푸하하"
- 농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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