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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1 세/웅크리기

[버티는 삶에 관하여] 허지웅 에세이

by 정가나 2021.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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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give us to accept with serenity the things that cannot be changed,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that should be changed, and the wisdom to distinguish the one from the other."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또한 그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버티는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내가 마음속에 지니고 다니는 문장은 '평온을 비는 기도'이다. 왜냐하면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을 구분하는 지혜를 가지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상황은 바꿀 수 있는 영역 내의 일인 것인가. 고민할 시간에 도전해보라는 책임 없는 말은 내뱉지 않았으면 한다. 바꿀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해 용기 내어 시도했을 때 실패하면 지금 당장의 그것도 유지하지 못한다. 차라리 바꿀 수 없다는 판단하에 현재를 평온히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다. 한번 선택하면 돌아갈 수 없다. 무엇이 더 나은, 올바른 선택인 것일까. 그 선택의 기준이 되는 지혜는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일까. 계속 부딪히고, 얻고자 하는 것을 잃고, 우울의 늪에 끝없이 침전하는 상황을 반복해야 겨우 얻게 되는 것일까. 그제야 겨우 눈을 뜰 수 있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삶이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것이지 않은가.

사람은 무엇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할 때 자연스럽게 용기와 열정이 생긴다. 사람은 무엇을 바꿀 수 없다고 확신할 때 이를 평온하게 받아들인다. 따라서 유의미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구별하는 지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혜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에 일단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부딪히기 싫어 지혜를 원한 것인데, 지혜를 원한다면 부딪혀야 한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판단하여 용기를 냈고 그것을 실패했을 때조차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가질 수 있다는 이유로 이 기도문은 의미를 가진다. 사실 이러한 결론이 평온을 비는 기도에서 말하고자 했던 지혜가 아니었을까. 그럴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고.

- 하나님, 니체는 어디로 거두어 가셨나요. 그는 당신이 죽었다고 하였는데, 당신께선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모르겠습니다. 모욕죄로 엄한 형벌에 처해졌을까요. 아니면 그가 주장한 것 그대로 영원히 반복되는 생에 갇히게 하셨을까요. 오직 과학으로만 세상을 이해하고자 했던 노력은 결국 최초에, 시작점에서의 이야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섰을 때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그때 당신이 존재함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딱 거기까지만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삶은 내 자유의지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이고 여기에는 그 어떠한 개입도 없음을, 위버멘쉬를 이상으로 삼아 살아가고자 하였습니다. 허나 모순적인 가치관이 내면에 동시에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삶은 오직 혼자서, 스스로의 힘으로만 살아가는 것이라 되새기던 내가 모순적이게도 이런 고민에 빠졌을 때에는 당신께 기대고 싶습니다. 

- 매번 이럴 때만 찾아뵙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언젠가 또 이럴 때쯤 찾아뵙겠습니다.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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