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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1 세/생채기

운수 안 좋은 날

by 정가나 2021.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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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조건적인 내 편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날 이후로 모두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여전히 함께 식사를 하고, 수다를 떨다 웃고, 여행도 같이 가곤 하지만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 그날 이후로 누구와도 싸워본 적이 없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지도 않는다.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

   그 날은 또 다른 그날들을 빚어냈다. 처참하게 부서진 밑동에서 처참하게 부서진 가지들이 솟아났다. 시작은 셋이서 빚어냈지만 이제는 셀 수도 없다. 다들 어딘가 망가져버렸다.

   이상하고, 신기하게도 굳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먼저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 오랜 지인들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도 여전히 아득히 멀리 있다. 본능적으로 설정된 자기 보호 시스템이 강하게 작동해 이젠 노력해도 정을 주지 못한다. 이젠 노력해도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없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아야 강해질 수 있다. 홀로 설 줄 알아야 버텨낼 수 있다.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잔혹한 현실이다. 이타적인 척, 의협심이 강한 척하지만 결국 스스로를 위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유전자로 쓰여있고, 유전자는 대개 이기적이다.

   원망하지도, 분노하지도, 슬퍼하지도, 비웃지도 않는다. 이게 자연스러운 거니까.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는 것이 숨 쉬듯 자연스러워지면 이상하리만큼 침착해진다. 생각해보면 자연은 늘 그래 왔다.

   작은 시기심들을 심고, 이기심으로 싹 틔워 오해로 빚어낸 나무는 잎을 만들지 않는다. 봉오리가 맺히긴 하지만 금세 사그라들곤 한다. 나무를 찾아와 잎이 나고 꽃이 피기를 바라며 물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근데 무작정 뿌리에 물만 대차게 뿌리고 간다. 오히려 뿌리가 썩어버린다.

   어디가 썩어있고, 어디에 고름이 차있는지는 오직 나무만이 안다. 갓 자라나 가지들을 일으킬 때에는 잘 몰랐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이제 저 자신의 흠을 온몸으로 느낀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전화가 걸려왔다. 여전히 그날에 머물러있는 사람이 있었다. 몇 마디 쏘아댔을 뿐인데 갑자기 울컥했다. 하지만 늦었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 인간은 세상을 자기 편할 대로 이해하는 법이다. 노력해서 나 자신을 바꿀 순 있어도 남들이 차고 있는 색안경을 부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증오했다. 세상에서 가장 죽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가장 죽이고 싶었다. 가만 보면 나무도 참 일그러졌다. 차라리 도끼를 가져와 밑동을 날려버릴까.

   진짜로 망가져버렸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정의는 무엇인가. 그들의 선이 나에겐 악이고 나의 선이 그들의 악인가. 죄의 인과율을 거슬러 태초의 인간을 저주하자. 책임은 그에게 있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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