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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1 세/생채기

시덥잖은 정의 갖다 치워

by 정가나 2021.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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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믿는다. 하지만 생존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으면 그것들이 모두 의미가 없어지는 게 현실이다.

   내 가족이, 내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면 반드시 피의자를 찾아내 그의 가족과 형제와 친구를 모두 죽일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내 가족, 내 사람들이 나를 정신적으로 살해했던 것도 현실이다.

   돌로 찍어 죽이고, 칼로 목을 베어버리고, 총으로 머리를 뚫고, 생화학 무기로 온몸을 불태워죽인다. 역사는 늘 힘 있는 자의 정의에 세상이 맞춰졌다. 그들의 정의엔 늘 희생과 살육이 정당화되었다.

   다수를 살리기 위해 소수를 버린 지도자는 언제나 반대파가 따른다. 그런데 그 소수에 지도자의 가족이 포함되어 있으면 모두 숙연해진다. 누군가는 죽어야 할 때 소수를 죽이는 결정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하지만 이 묘한 살인충동은 뭘까. 가족이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의 논리는 지도자의 죽음으로 향한다.

  피의 역사로 지어진 자유와 평화의 도시에서 사랑을 논하는 일은 필히 처형대 위에 세워지게 되어있다. 아이러니한 건 천국을 세우고자 목숨을 걸었던 자들이 처형인이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딱히 평화 따위가 아니다.

   전쟁은 종전 후에도 희생자를 만든다. 트라우마는 정신 깊숙히 박혀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계속해서 그들을 괴롭힌다. 그들이 목숨을 걸어 만들어낸 평화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자유를 외치며 웃는다. 그런 그들의 평화를 빼앗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아비, 어미들이다. 펜을 쥐고자 했던 아이의 손에 총을 들리고 군복과 군모를 입힌다. 늘 전투에 대비하게끔 가르친다. 아이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늘 싸운다. 그렇게 아이의 자아는 살해된다.

   아이는 이제 그들의 부모에게 총을 겨누어야 한다. 그들이 쌓아올린 이름뿐인 평화를 짓밟고 스스로의 세계를 다시 쌓아올려야 한다. 그리고 이 존속살인의 굴레를 멈추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총을 겨누어야 한다. 그렇게 세워진 도시만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 국가일 것이며 평화를 외치며 사랑할 수 있는 곳이 될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살해하지 않기를 부탁한다. 시덥잖은 몇 십년짜리 철학과 논리로 한 생명을 기르지 않기를 부탁한다. 나는 나에게 이 정신병의 굴레를 나의 대에서 끊어낼 수 있기를 빌어본다. 나와 나의 아이만큼은 진정한 독립국가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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